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노 학교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나카노 학교는 [[도쿄]] 외곽 [[나카노구]]에 ‘후방근무요원양성소’라는 이름으로 [[1938년]] 4월 창설된 [[일본제국]]의 비밀 정보요원 양성 기관이었다. [[1940년]] 8월 나카노 학교로 개칭했으며 외부에는 ‘동부 33부대’로 알려졌다. [[1945년]] [[8월 15일]] [[태평양 전쟁]] 패망까지 2,300여 명의 요원들을 배출했고 이들은 졸업 후 [[일본군]]에서 [[정보참모]]로 활동했다. 학생들은 [[일본육군사관학교]] 출신들이 너무나 틀에 박힌 사고를 할 우려가 있어, 주로 일반 대학교를 나온 예비사관학교 출신자들을 선발하여 1년간 교육을 시켰다. 평범한 건물에서 [[정장]]을 입고 [[장발]]을 하였으며, [[군기훈련]]이 없었고 토론식 교육을 하였다. 그리고 서로의 진짜 신분을 모른 채 [[가명]]을 사용했다. [[1944년]] 9월에는 [[게릴라|유격전]]을 수행할 ‘후타마타 분교’가 [[시즈오카현]] 하마마타시에 생겼다. 교육생은 주로 예비사관학교 졸업자 및 현역 장교들이었고, 마지막 패잔병 [[오노다 히로]] 소위가 1기생이었다. 전후 일본군이 해체되고 각지로 뿔뿔히 흩어졌는데. 대부분은 [[캐논 기관]]이나 [[내각정보조사실]], 경찰청 공안부 등 정보기관들의 모태가 되거나, [[종합상사]]같은 정보력이 요구되는 민간기업으로 간 경우도 있다. 나카노 학교 출신 [[조선인]]으로는 [[1961년]] 12월 [[일본]]에서 일어단 쿠데타 미수 사건인 ‘[[삼무사건]]’으로 체포된 13명의 인사들 중 강경길이라는 [[한국인]]이 나카노 학교 졸업생이라는 보도가 있고, 나카노교우회 명단에 따르면 가네야마 마사하루가 [[평양]] 출신인 김양찬이었음을 확인했다는 보도도 있다. 일설에 의하면 [[이철희]]나 [[이후락]]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하는데[[https://www.joongang.co.kr/article/3887984|관련기사]] 사실이 아니다. >우리는 일본의 나가노 학교를 모델 삼아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. 나가노 학교는 일본 제국 군대가 만주와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에 앞서 청년 정보장교들이 미리 현지에 침투해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사전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는 전설적인 정보장교 양성소였다. >-[[중앙정보부]] 공채 1기생 [[이종찬(1936)]]의 회고록 <숲은 고요하지 않다> 1권 202페이지 이종찬은 1964년 중정에 들어갈 때 나카노 학교를 모델 삼아 훈련을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. 그는 훗날 제 22대 국정원장이 되었으니, 우리의 정보기관인 중정의 교육 모델이 나카노 학교라는 것은 오피셜 기록이라 할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